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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용감한 부관들 – 녹도만호 정운, 지도만호 송희립

이 연재글은 이순신 장군 이야기의 2번째 글입니다.

녹도만호 정운

녹도만호 정운

조선 중기의 무신 정운은 1543년 전라도 영암군 옥천종면 대산리(현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기자전 참봉(종9품)과 훈련원 참군(정7품)을 지낸 정응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28세 되던 1570년(선조 3)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20위로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 금갑도 수군권관, 거산찰방을 거쳐 웅천 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이후 제주판관 때 목사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1년(선조 24년) 녹도만호가 되었다.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장군과 갈등을 빚는 역할로 나왔다가 점점 감화되어 장군을 따르는 것 처럼 나오는데 이는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실제로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 부임 이후 가장 신뢰하고 의지했던 참모 중 한사람이었다.

이순신이 정운의 영전에 올린 제문 – 제증참판정운문(祭贈參判鄭運文)중

충무공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그대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를 위해 던진 그 몸은 죽었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은 하늘에 달렸으니, 사람으로써 한번 죽음에 아쉬워 할 이유가 없으나, 오직 그대에 관련해서는 마음이 아프도다.”

지도만호 송희립

지도만호 송희립

조선 중기의 무신 송희립은 1553년 전라도 홍양현 대강면 마륜리(현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현감(종6품)을 지낸 송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83년(선조 16)에 별시로 치른 무과에 병과 159위로 급제하고 1591년에 이순신의 직속군관이 되었다. 귀선의 건조교육과 감독을 하다가 전쟁이 터지자 그해 5월 1일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서 거제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남해 앞바다에 머물며 원균 등과의 합동작전을 주장하였다. 이후 지도만호가 되어 형 송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이순신이 모함으로 한양으로 압송돼 고문을 받고 있는 동안 정경달, 정탁, 황대중과 함께 대궐 문앞에서 거적을 깔고 울부짖으면서 이순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고 권율 휘하에 들어가 백의종군하게된다.

유군장 나대용

유군장 나대용

나대용은 1556년 전라도 나주목 거평면 오륜동(현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에서 정로위로 복무하던 나항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문장이 뛰어나 문인이 되려 하였으나, 1583년(선조 16년) 훈련원 별시에 병과 급제하여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거북선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병선 연구에 힘썼는데 특히 거북선을 건조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1592년 옥포해전에서 유군장 직을 맡아, 적의 대선 두 척을 격파하고, 사천 해전에서는 분전 끝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고, 한산도 해전에서도 부상을 당하였다. 명량해전과 1598년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이와 같은 공을 인정받아, 1594년 강진현감으로 제수 되었고, 이어 금구, 능성, 고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전라 좌수영 그리고 이순신 장군

전라 좌수영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집결시키고 한창 전투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순신은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열었는데 전라 좌수영의 장수들이 하나같이 말하길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 판국인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서 싸우겠습니까?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 단 두명만이 이 말에 반대하며 강력히 맞섰다.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소.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 놓아야 이 곳 전라도를 보전 할 수 있소이다.

이순신 장군 뿐 아니라 전라좌수영에 있던 휘하 장군들이 전부 다 이순신의 뜻과 같이 “갑시다. 우리가 경상도에 가서 왜구를 막아야 됩니다. 그 곳도 우리나라 땅 아닙니까?” 하며 나와서 싸웠기 때문에 승리를 했고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기 때문에 대 승리를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영원한 부장이자 발명가 거북선의 아버지 나대용

나대용

임진왜란 당시에 군관은 자발적인 종군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특히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의 군관들의 역할은 엄청났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해전에 직접 뛰어들어서 수사와 함께 사력을 다해서 전투를 벌였다거나 나대용 같은 경우는 전선감조군관으로서 군기수리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요.

나대용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일화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이 정읍 현감으로 계시다가 1591년 전라 좌수사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서 거북선 연구를 하시다가 어느정도 완성이 되어서 자기 종형제 치용하고 같이 여수 좌수영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거기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을 만나게 되죠.

나대용 생가 – 전남 나주시 문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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