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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도 없고 대학교도 잘리고 사는게 참 이상해서 죽을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요
몇년전 1200만원 가량의 빚을 갚았는데, 도로 2천만원 빚이 생기고 직장도 없고 대학교도 잘리고 사는게 참 이상해서 죽을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요. 저는 그때 당시 단칸방에서 강아지 없이 혼자 살았기 때문에 죽어야겠다 마음 먹는 순간 다 쉽더라고요. 일단 집을 다 치웠어요 컴퓨터 포맷까지 하고, 100리터 짜리 쓰레기 봉투를 사서 내가 죽었을 때 남은 절대 안 봤으면 좋겠다 싶은건 다 담아서 버렸습니다.
이제 죽으려고 보니까 이런 반지하 단칸방에서 시체로 발견 되기가 너무 싫은 거예요. 누가 내 시체를 수습한다고 보는 것도 싫고…그래서 아무도 내 시체를 찾지 못하게 산에서 투신을 하자 생각 했습니다. 저는 그때 가족들이랑 다 연락을 끊고 살아서 죽게 되면 오랜시간 찾아 줄 사람이 없었어요.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제가 연락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연락이 끊겨도 그러려니 하는 친구들이었고…
그래서 아예 못 찾아버리게 죽자 생각해버렸습니다
그때 당시 전재산이 2만원이었어요. 그 돈으로 당일 터미널에서 가장 늦은 시간, 새벽 12시에 출발해 새벽 3시에 도착하는 백무동행 고속버스를 예매 했습니다. 지리산으로 가는 버스였어요.
지리산에서 떨어져 죽자 그렇게 됐습니다
터미널에서 표를 끊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여기서 1차로 당황하게 됩니다 평일인데도 등산을 가시는 분들이 엄청 많아서 버스가 거의 만원버스인거예요. 전 새벽 버스라 저 혼자 탈 줄 알았거든요. 저는 죽으러 가는데 여행을 떠나는 사람과 한 버스에 섞여 지리산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새벽 고속버스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백무동까지 내려왔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내 인생은 어디서 부터 잘못됐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있었겠죠.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버스는 백무동에 도착을 했습니다
버스에 함께 탔던 등산객들은 정류소 근처 저마다 의 숙소들로 흩어졌고 저는 그 어두운 새벽의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산길이 시작되었어요 포장도로를 걸을 땐 앞이 보였는데 산속으로 들어가니 온 통 새까맣고 바로 발 밑조차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지금 다시 가라 그러면 못가요 무서워서…
그때는 죽을 생각에 겁대가리를 완전히 상실했던거죠. 얕은 곳에서 죽으면 쉽게 발견될테니 깊은 곳에서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해뜨기 전에요. 느릿느릿 산길을 계속 올랐습니다 저는 그때 아무 생각이 없어서 뒤에서 어떤 노부부가 따라 올라오는걸 모르고 있었어요. 새벽 등산을 오신건지 머리에 랜턴을 쓰고 계셨는데 척척 올라오시다가 어둠속에서 제가 보이자 크게 놀라셨는지 아주머니께서는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귀신을 본줄 알았대요. 아주머니가 심장을 부여잡고 “학생 이 시간에 그러고 온 거야? 랜턴도 없이 여기를 어떻게 올라가? 혼자 온거야?” 하고 저에게 여러 소리를 하셨어요.
노부부가 머리에 쓰고 있던 랜턴을 벗어 저에게 주셨어요
저는 죽으러 왔기 때문에 이런 관심들이 다 성가시고 짜증나고 불편하고…그냥 노부부가 알아서 갈길을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걱정이 많으신 아주머니가 해 뜰 때까지만 같이 가자고 말을 하시길래 저는 괜찮다고 했습니다.그러자 아주머니 옆에 남편분이 머리에 쓰고 있던 랜턴을 벗어 저에게 주셨어요. 랜턴 없으면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 이거 쓰고 가라고 나는 집사람 랜턴 빛 따라 가면 된다고…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이 호의가 참 불편하고 짜증나고 싫었습니다
죽으러 가는데 괜히 목격자 만든 것 같고 귀찮고 간섭받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됐다고 했습니다. 앞 보이니까 괜찮다고. 그래도 굳이 굳이 제 손에 쥐어주고 산행 조심히 하라고 말씀하시더니 제가 불편해 하는게 보였는지 먼저 가시더라고요…저는 손에 랜턴만 달랑 들고 다시 산을 올랐습니다 앞서 가던 노부부는 종종 저를 돌아보시는 것 같았어요. 저는 끝내 랜턴을 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버리지는 못하고 손에 쥐고만 있었어요 한 2시간쯤 올라갔을까요.
해가 조금 밝아서 앞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는 힘든 줄도 모르고 계속 걸었습니다. 슬슬 적당한 곳을 찾아야 했어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유심히 둘러보는데 숙식이 가능한 대피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표지판을 봤어요. 생각보다 높이 올라왔더라고요. 대피소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생각을 하고 걸음을 돌렸는데 하필 그 길이 오랜 등산을 해오신 분들에게 대피소와 연결된 지름길로 알려진 길이 있었던 겁니다. 지름길인만큼 엄청 험하고 경사지고 위험했어요. 저는 지름길인걸 모르니 그냥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이라 험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아직 죽을 곳이 마땅치 않아 계속 걷다보니 대피소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2차 당황을 하고 맙니다. 새벽 6시 정도 됐는데 대피소에 사람이 바글바글 한겁니다. 라면 끓여먹는 사람들 세수 양치하는 사람들…저는 알 수 없이 밀려오는 짜증과 허탈함에 잠깐 바위에 걸터 앉아 쉬었습니다.
이 산은 어딜가도 사람이 있었어요. 주말도 아닌데 말이에요. 어디서 죽나 어떻게 죽나 사실 나 죽는거 무서워서 계 속 사람들 핑계로 걷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죽어야지 죽어서 끝내야지 다시 그 생각을 하고 일어났습니다. 죽을 용기를 냈어요. 다시 산 위로 오르는 길을 걷는데 대피소에서 막 나오신 아주머니 세 네분이 저를 보고 말을 걸었어요.
“학생 그러고 여기까지 올라왔어? 혼자 온거야?”
저는 죽으러 왔기 때문에 그냥 반팔티에 검은바지에 운동화가 다 였어요. 등산 가방도 없고 스틱도 없고, 양말 조차 발목 양말에 물 통하나 들고 있지 않았거든요. 제 몰골이 누가봐도 등산하는 몰골은 아니었는지 아주머니들이 어떻게 그러고 여기까지 왔느냐고 젊어서 좋다고 막 그러셨어요 저는…네…또 귀찮고 짜증나고 싫었습니다. 그때 아주머니 한분이 가방을 여시더니 포장도 뜯지 않은 등산 양말 새것과 500미리 물을 저에게 주셨어요. 양말 그런거 신고 올라가면 발톱 다 빠진다고, 발 다 상한다고…물도 여기는 약수터가 없으니까 이거 마시라고…저는 또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랜턴을 쥐고 있는 손에 억지로 약말과 물통을 쥐어주시는 겁니다
저는 분명 빈손으로 올라왔는데 벌써 양손에는 랜턴과 양 말 그리고 물이 생겨버렸습니다.
또 다른 아주머니께서는 초코바와 마가렛뜨 과자까지 주셨어요. “우리 딸래미는 등산 가자고 백날을 말해도 따라오지 않는데 혼자 등산도 오고 기특하다” 같은 말까지 해주시면서요… 참 이상하죠 세상이.
저는 양손에 많은 것들을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죽고 싶었지만 날은 밝고 말았어요
7시 아침이 된겁니다. 이제 다니는 산길마다 사람들이 있었어요. 근데요 그 사람들이 모든 등산객을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세요? 안전 산행하세요” 같은 인사를 주고 받는 겁니다. 눈을 일부러 마주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저에게 안전산행 하라고 웃어주며 인사를 건냈어요. 어떤 사람은 정상이 얼 마 남지 않았으니 힘내라고 오늘 날이 좋아서 정상가면 절경이라고 혼자 떠들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죽을 수가 없었어요. 자꾸 사람을 봐서 그런가 해가 떠서 그런가 죽을 수가 없었어요.
결국 정상까지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등산객들을 따라 저는 지리산 정상에 올라갔어요. 죽고 싶긴 했지만 죽고 싶지 않았어요. 천왕봉 위가 아름다웠어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꼭 현실이 아닌 것 같이… 돌 위에 가만히 앉아 아래 펼쳐진 산의 능선들과 구름을 바라보았어요. 하염없이 바라봤습니다. 그때 열 댓분씩 무리지어 등산 온 중년 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저에게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천왕봉 풍경에 빠져있던 저는 흔쾌히 까진 아니지만 짜증이나 귀찮은 모양 없이 사진을 찍어드리기로 했습니다. 사진을 다 쥐어드리고 휴대폰을 드릴 때 아주머니 한분이 저에게 “학생은 혼자왔어? 학생도 찍어 내가 찍어줄게” 라고 했습니다. 저는 죽으러 왔기 때문에 휴대폰을 배터리와 분리해 (노트4 쓰던 시절) 놓은 상태였어요. 죽기전 각각 멀리 던져버릴 계획이었습니다. 저는 괜찮다고 했어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사진 안 찍긴 너무 아깝다고 그러시는 겁니다. 남는게 사진이라고 저는 끝내 거절을 해서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아주머니와 아저씨 무리가 돌아간 뒤…
정상에 몇시간을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올라오는 이 내려가는 이 모두를 지켜보고 내 인생을 돌아보고 결국 휴대폰 전원을 켜고 지리산의 풍경을 찍었습니다.
이 순간 저는 죽기로 한 마음을 모두 접어버렸어요.
그때 찍었던 사진 입니다. 죽을 마음이 사라지자 배가 고팠습니다. 밥이 먹고 싶었어요. 정상에는 아침 8시에 도착했는데 내려 가려고 보니 오후 2시였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저는 저 풍경을 바라보며 죽을 용기를 죽였어요. 저는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살아서 내려가기로 했어요. 아주머니가 주신 등산 양말을 신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저는 전 재산을 털고 죽기 위해 이곳에 온지라 집에 돌아갈 돈이 없었어요…지리산에서 내려와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정류소에서 저는 아무 생각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돈이 없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니…그냥 죽을걸…하는 생각이 울컥 났던 것 같기도 해요. 1시간을 앉아있었을까요.
버스정류소 뒤 주차장에 있던 아저씨가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디까지 가냐고 태워줄테니 타라고.
저는 평소 아저씨들과 말 섞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원래 같으면 무시했겠지만 집에 너무 너무 가고 싶었어요. 저는 서울에 가야하는데 돈이 부족하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아저씨는 대전 사람이었어요.
저를 차에 태워 터미널까지 가서 서울행 버스 티켓까지 직접 끊어주셨습니다
참..참..이상한 하루였어요. 저는 아저씨께 버스표를 받으며 그날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랜턴을 주신 부부와 대피소의 아주머니와 이 아저씨 덕분에 저는 살아서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충동을 느끼시는 분들에 조금이나마 컴다운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여전히 세상은 이상하고, 저는 요즘도 가끔씩 왜 세상이 나에게만 야박하고 나를 못 살게 굴어 안달인지 화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죽을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죽다 살아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힘이 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리산에 올라야 했던 저와 같은 충동을 느끼시는 분들에 조금이나마 컴다운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