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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리
1913년 11월 5일 영국령 인도 출생
비비안 리는 1913년 11월 5일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의 다즐링에서 태어났다. 연기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등도 배워서 어느 정도는 다룰 줄 알았으며, 무용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외동딸로 자랐고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명 연기로 유명한 전설적인 배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나 수상할만큼 미모와 연기력을 동시에 소유한 어마어마한 배우이다. 역대 세계 영화 역사상 한 손에 꼽을만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매력적으로 소화하며 일약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
빠른 결혼으로 인한 우울증. 연기자로서의 데뷔
18살에 영국에서 왕립 연극학교에 다니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어린 나이에 13살 연상의 귀족인 ‘허버트 리 홀먼’과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보수적이었던 남편은 그녀의 배우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고, 때문에 그녀는 다니던 학교도 그만둬야 했다.
겨우 20세에 첫 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가정주부 생활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던 비비안 리는, 친구들의 독려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되고 곧 자신의 에이전트를 만나게 된다. 이후 연극 무대에 데뷔한 그녀는 첫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찬사를 받는다.
로렌스 올리비에와의 불륜
로렌스 올리비에는 찰리 채플린, 오드리 헵번과 함께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이자 셰익스피어 작품 연기의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배우계의 전설이다. 할리우드 최초로 외국인으로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으며, 프로듀서, 연출가이기도 했다. 미국 영화 연구소는 그를 역사상 위대한 남배우 14위에 선정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10위인 찰리 채플린 다음으로 높은 순위에 올랐다.
데뷔 무대를 보고 비비안에게 반한 올리비에
데뷔 무대를 본 로렌스 올리비에가 비비안에게 다가가고 둘은 곧 불륜 상대가 된다. 원래는 둘 모두 배우자와 이혼하려 했지만, 양쪽의 상대들이 모두 이혼에 반대하는 바람에 불륜이 되고 만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대 성공 후 부부가 된 비비안과 올리비에
비비안 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대스타가 되고 난 이후인 1940년 둘은 결혼하였다.
연기에 대한 악평과 남편에 대한 비교로 시달렸던 비비안
완벽주의자였던 비비안은 소수의 악평에도 심한 상처를 입었고, 아무리 좋은 연극 평이 나와도 나쁜 평에만 집착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이후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한쪽이 캐스팅되면 한쪽은 실패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결렬된다. 설상가상으로 평소 비비안 리의 건강 상태가 안 좋았던 탓에 부부의 2세를 계속 유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조울증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결국 발작 증세까지 일으키게 된다. 특히, 영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촬영 중에 아이를 유산했을 때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비비안 리의 조울증은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정도로 악화되어 1960년 이혼하였고. 이후 로렌스 올리비에는 조앤 플로라이트와 재혼하고, 비비안 리는 잭 메리발이라는 남자와 파트너 관계로 지내게 된다.
폐암으로 투병 끝에 사망한 비비안 리
이혼 이후에도 비비안 리는 로렌스 올리비에를 잊지못하고 침대 머리맡에 사진을 두고, 레이디 올리비에(로렌스 올리비에는 연기에 헌신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로 불리길 원했다고 한다.
1967년 7월 8일 비비안 리는 오랜 투병 끝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폐결핵에 걸리게 된 사유는 흡연. 사실 비비안은 하루에 담배를 3갑 이상을 피울 정도로 지독한 골초였다고 한다. 사망 당시 올리비에의 사진을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비비안을 평생 사랑했던 올리비에
비비안 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비비안 리의 집에 도착한 올리비에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올리비에는 리의 장례식을 실질적으로 준비했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그녀 생전의 세 배우자 – 홀만 박사, 올리비에 경, 그리고 존이 함께 했다. 조안 플로라이트의 인터뷰에 의하면 리가 죽은 뒤 올리비에는 한밤중에 그녀의 영화를 돌려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비비안 리는 생전 인터뷰에서 평생 그를 사랑하겠다고 밝혔을 정도로 올리비에를 사랑하였으며 올리비에 역시 비비안 리가 죽자 죄책감에 매우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