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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박사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서재필은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언론인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의사이다. 또한 미국에서 병리학자·의사·시인·소설가로 활동하였다. 1977년 11월 30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서재필은 흔히 구한말 독립운동가, 독립신문 등으로 알려져 있다. 서재필의 생애 전체를 짚기엔 너무 길고 서재필의 인생 최저점과 그 복수를 다루려고 한다.
최연소 과거 급제
서재필은 1882년에 임오군란이 끝난 후 문과 3등으로 최연소 급제하고 주위의 촉망을 받게 된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일본 책들을 보며, 서구화에 대한 꿈을 꾼다.
갑신정변과 멸문지화
급진 개화파는 1884년에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갑신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일본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난을 일으켰다. 고종을 속이고 새 내각을 구성해 정강 14조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청군이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자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여 삼일천하로 끝났다.
이 당시 서재필은 무사로서 활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청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갑신정변 주동자들은 이른바 멸문지화를 당한다. 서재필 집만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야말로 집안이 박살이 나버린다.
생부 서광효 = 자살
양부 서광하 = 전재산 몰수 노비행
아내 = 자살
2살 아들 = 굶어 죽음
맏형 서재춘 = 감옥에 갇혔다 독약 먹고 자살
이복형 서재형 = 관군에 잡힌 후 참수
생모 = 노비행. 이후 자살
일본으로의 피신
이후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제물포로 피신한 후 일본으로 도망간다. 해외에서 가족들의 참상을 소식으로 접한 서재필은 이후 조선에 대한 환멸감과 분노에 휩싸였고 조선에 대한 관심은 차차 끊고 일본에서 막노동 등을 하며 생활한다.
일본의 토사구팽. 그리고 미국행을 택한 서재필
서재필 일행은 자신들이 일본에게 토사구팽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서재필, 박명효, 서광범 등은 미국으로, 김옥균은 청나라로 향한다. 서재필 일행은 미국에 상륙하였다.
하지만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을 못한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렸다. 서광범 역시 조금 생활하다가 양반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 당시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고작 20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인종차별이 극심한 시기였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의 짐칸까지 짐승처럼 밀려버리기까지 하였다.
미국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최초의 한인 의사가 된 서재필
서재필은 이후 막노동, 가구점 알바 등등 극한의 환경에서 일하다가 존 홀렌벡 등의 후원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역사, 철학, 과학 등 서구 학문을 배운다. 이후 조선 선교사로 가라는 홀렌벡의 통보를 거절하여 (조선에서 역적의 신분이므로 갈 수가 없음) 후원이 끊겼지만 하트 교수 등등의 후원으로 타 대학 입학과 중퇴 이후 그는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전신) 의예과에 입학 후 한인 최초로 미국 의사가 된다.
미국인 뮤리엘과의 결혼
그는 이때 미국 시민권을 따고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개명한다. 그는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의 과외 가정교사를 하였는데, 연매를 시작하게 된다. 뮤리엘은 오랜 이국 생활과 인종차별로 지친 그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그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이런 인간미에 반한 그는 뮤리엘에게 청혼하였다.
뮤리엘은 미국의 전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과 친척간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 철도 우편국의 초대 국장이었다.
그녀의 많은 주변인들은 결혼을 말렸지만 그녀는 서재필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서재필은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되었다.
뮤리엘과 서재필 일화
뮤리엘이 서재필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특이한데 밤길에 불량배에게 희롱당하던 뮤리엘을 서재필이 구해줬다고 한다. 서재필이 당시로서 178cm의 큰 키에 갑신정변 때 무사로 활약했을 정도이니 불량배쯤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심한 시대에 백인들은 동양인 의사인 그를 찾지 않았고 그는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갑오개혁과 서재필의 귀환
한편 조선에서는 일본의 입김이 거세지는 가운데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갑신정변의 주동자들은 사면령이 내려졌다. 1895년 박정양 내각이 설립되자 실세였던 박영효는 서재필에게 계속 귀국을 종용하였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와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가족들의 멸문지화, 미국에서의 인종차별 등으로 조선을 완전히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박영효를 워싱턴 시에서 10년 만에 만나고 조선을 한번 바꿔보겠다는 결심으로 귀국을 하였다.
독립신문에도 개재된 서재필과 외국인 아내의 귀환
그의 귀국길은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당시는 백인 여성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서재필이 백인 여성과 결혼을 하고서 귀국하였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조선의 모든 것에 냉담해져 있었다. 그는 귀국 후 항상 영어를 사용하였으며 한국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오랜 친구 윤치호 등이 왜 영어를 쓰냐고 하자 한국어는 까먹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해방 후 연설에서 한국어를 사용하였던 만큼 이는 거짓말이다)
윤치호가 서재필에게 그의 전처의 묘소와 생모의 묘소등을 알려주었으나 그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권고를 거절한다. 갑신정변 때 연좌제로 인해 천민으로 강등된 그의 양부 서광하가 찾아왔지만 못 본 척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이를 본 윤치호는 그를 냉정한 인간이라며 윤치호 일기에 기록하였다.
관직을 거부하고 중추원 고문이 되다
서재필은 조선인으로서 관직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총리대신과 같은 월급인 월봉 300원의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종과 서재필의 일화
서재필이 고종을 알현하러 궁궐에 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왕 앞에서 만경을 벗는 것이 관례였다. 임금 앞에서 안경을 끼면 불경죄로 다스리던 시대였다. 궁궐 입구에서 그에게 안경을 벗으라고 하였으나 서재필은 거절했다. 궐 앞에 이르러 나인들이 다시 저지하였다. 임금 앞에서는 안경을 쓸 수 없으니 안경을 벗으라고… 하지만 서재필은 다시 거절한다.
나는 조선인이 아니라 미국 시민권자다.
나는 조선의 관리가 아니라 외신이다. 그는 끝내 고집을 부렸고 만경을 쓴 채로 고종을 만난다. 고종 앞에 섰다. 서재필, 그는 앞에서 절하지 않았다.
안경을 쓰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팔짱을 낀 채로 고종의 물음에 그대로 말대답을 하였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짝다리를 짚었고 고종 앞에서 손가락 담배를 피웠다. 이에 대신들과 조정들이 경악을 하였다. 그가 서양 도깨비에게 흘려서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에 살면서 본국에 있는 본처와 헤어지고 미국 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갑오년에 환국한 뒤 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쓰고, 궐련을 꼬나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 외신을 칭했다. 이에 조정이 온통 분노했다. – 황현, 매천야록 –
서재필은 매사에 지시하기를 좋아하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력적이고 단호하고 기민했다. 원로 대신, 젊은 관료 할 것 없이 마치 버릇없는 애들을 타이르듯이 말하거나 다루었으나. 이들은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윤치호 일기 –
고종은 서재필의 말처럼 ‘외신’인 서재필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안경 사건 때의 그 통역관을 트집 잡아 섬으로 귀양 보내버렸다. 서재필이 고종에게 복수하기까지는 약 10년이 조금 더 걸렸다. 단지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