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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장애인 미국 유학생 강영우 박사: 어둠을 딛고 미국 장애인 유학생이 된 놀라운 인생 이야기

이 연재글은 인물 열전의 13번째 글입니다.

한국인 최초 장애인 유학생 강영우 박사

한국인 출신 미국 관료 – 1944.1.6 ~ 2012.2.24

강영우는 1944년 1월 6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이 매우 불우했는데,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듬해 중학교를 다니던 중 학교에서 축구를 하다가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 박리를 앓았으며, 당시 국내 의료 기술이 뒤쳐졌던 까닭에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고, 몇 년 후에 의지하던 누나까지 죽는 바람에 졸지에 고아가 되었으며, 10대 시각 장애인 가장으로 불우한 청소년기를 지냈다. 동생 둘 중 하나는 친척 집에서 데려가고 다른 한 명은 고아원에 갔다.

강영우 박사

10대 후반에 시각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며 기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어하였으나 주변의 반대가 심하였다. 그럼에도 온갖 노력 끝에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이 때 나중에 부인이 된 연상의 여인인 석은옥을 만나게 되었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국제 로터리 재단으로부터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유학길에 올라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문교부(교육부의 전신)는 장애를 해외 유학의 결격 사유로 규정하였으나, 그의 유학으로 이 조항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에서 장애인 최초의 정규 유학생이 되었다. 또한 한국인 최초로 장애인이면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례가 되었다.

이후 일리노이 대학교 교수, 일리노이 주 특수교육국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2001년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의 장애인위원회 정책 차관보에 임명되었다. 이는 당시 한국인 100년 미국 이민사에서 최고위 공직이었다.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 중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 낸 것.

강영우 박사 내외와 부시 대통령

암보다 무서운 건 포기다

44년생 2012년 소천 3개월 전에 유언식으로 작성된 글 옮겨봅니다.

68세를 일기로 유명(幽明)을 달리한 전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위원(차관보급) 강영우(경기 양평 출신) 박사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는 열네 살 때 눈을 다쳐 실명(失明) 했다. 공교롭게도 그 일을 전후해 아버지와 어머니 가 차례로 돌아가셨다.

그러자 열일곱 살이던 누나가 어린 세 동생을 부양하느라 학교를 그만두고 봉제공장에 취직해 일하다 16개월 만에 과로로 쓰러져 세상 을 뜨고 말았다.

결국 남은 3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강영우는 맹인재활원 으로, 열세 살 됐던 남동생 은 철물점 직원으로, 아홉 살의 여동생은 보육원 으로 가야 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맹인재활원에 들어간 강영우는 기를 쓰고 공부해 1968년 서울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한 뒤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입시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맹인이 무슨 대학?” 하는 당시 우리 사회의 편견 이었다.

마침내 72년 각고의 노력 끝에 단과대 차석으로 연세대를 졸업 한 후 그는 한미재단과 국제로타리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강영우 박사와 그의 아내 석은옥씨

멀쩡한 사람도 유학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용케도 76년 피츠버그대에서 교육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강영우 박사는 77년부터 99년까지 22년 동안 미국 인디애나주 정부의 특수교육국장과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특수교육학 교수 등으로 재직한 뒤 마침내 2001년 차관보 급인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됐다.

말 그대로 ‘Impossible(불가능한)’이란 단어에 점 하나를 찍으면 “I’m possible” (나는 할 수 있다)로 바뀌듯이 그는 삶의 숱한 고비고비마다 그냥 점이 아니라 땀방울과 핏방울을 찍어 가며 삶의 길을 열어 갔던 것이다.

물론 강영우 박사의 뒤에는 항상 아내 석은옥 씨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강 박사가 다니던 맹인학교 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강 박사는 학생이었고 석씨는 그곳에 봉사 나온 여대생이었다.

강 박사는 누이 같은 그녀에게 프러포즈했고 결국 결혼 해서 두 아들을 뒀다.

강영우 박사와 그의 두 아들

큰아들 폴(진석)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조지타운대 안과 교수로 일하면서 역대 미 대통령 을 진료해 온 ‘워싱턴 안과의사연합’ 8인 멤버 중의 한 사람이자 워싱턴 포스트가 선정한 2011년 최고의 의사 ‘수퍼 닥터’에 선정됐다.

둘째 크리스토퍼(진영)는 변호사로 미 민주당 원내총무실의 최연소 수석법률비서관을 거쳐 현재는 백악관의 선임 법률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말이지 남부러울 것 없던 강영우 박사에게 지난 연말 시한부 선고가 내려졌다. 췌장암이었다.

길어야 두 달 정도밖에는 생명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는 지인들에게 담담 하게 e-메일을 보냈다. 감사편지였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 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영우 박사와 그의 가족들

그 후 임종 을 앞두고 두 아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해 보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긴 채로 자라 준 너희들이 고맙고,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언제나 ‘나의 어둠을 밝혀 주는 촛불’이라 부르던 아내에게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는 말로 맺은 마지막 연서를 전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의 자신이 있게끔 지원했던 국제로타리 재단에 25만 달러를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강 박사는 생전에 “‘nowhere’란 단어에 스페이스바 한 번 치면 ‘now here’로 바뀐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어디에도 (돌파구가) 없다”는 말이 “지금 여기” 로 바뀌듯이 그 어떤 절망과 역경에도 포기 하지 않았다.

그에게 포기란 암보다 더 무섭고 나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살아온 인생은 보통사람들보다 어려웠 습니다. 하지만 결과적 으론 나쁜 일 때문에 내 삶에는 더 좋은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이제 두 눈 멀쩡히 뜬 채 살아 있는 우리가 삶으로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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